저에게 올바른 크리스챤의 기준이 독서에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책,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광고인으로써 활동하고 있는 박웅현 선생님이 펼친 책입니다.

<책은 도끼다>는 박웅현이 3주마다 인문학 책을 추천해주는 강독회를 한 것을 글로 낸 것입니다. 강독회 내용이다보니 지루하지 않고 실제 듣는 것 같이 가볍게 읽혀집니다.

이런 면에서 가독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책의 초반 1/3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일만 바쁘게 하느라 메말랐던 저의 인문학 정서를 촉촉히 젖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책의 제목 <책은 도끼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전에 카프카가 한 말을 적어놨는데요.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책은 도끼다, 박웅현

생각해볼만한 문장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나머지 2/3은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그래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 기준, 저 기준에 휘둘리겠구나.”

이 책은 크리스챤 정신과 맞지 않는 책입니다.

저자 박웅현이 불교 사상에 심취해 있는 것도 그렇고포스트모더니즘의 “carpe diem”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기준도 그렇고, 엘리트주의를 최고로 내세우는 개념이 그렇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엘리트주의가 나타나는 두 가지 형태에 대해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엘리트주의 현상 첫 번째 – Carpe Diem, 현재가 중요하다

Carpe Diem은 라틴어로 “Seize the day!”라는 뜻으로서, “현재를 즐겨라라는 문장입니다. 쾌락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를 박웅현은 소개를 하면서, 유명한 책 [이방인]에 대한 서평을 합니다.

[이방인] 책에 나오는 주인공인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현재 감정에 매우 충실한, 그래서 미래의 걱정이나 이상으로 거짓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있는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박웅현의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날 여자랑 섹스를 합니다. 슬픔은 잡히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고, 거짓 감정에 휩싸인다는 것이죠. 햇살 찬란한 지중해에 위치한 알제에 살고 있는 뫼르소는, 현재가 전부이고 감정이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그를 이방인이라 부르고 이방인이 된 뫼르소는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도 그는 담배, 해수욕, 여자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책은 도끼다, 박웅현

사이코패스를 동경하고 미화하는 이 기준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저자는 마치 일반인이 하는 행동이 아닌 아주 특출난 행동 자체가 창의로운 사람이거나 천재로 미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정신병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학구적으로는 매우 똑똑하나 사회적인 스킬을 배우지 못해 민폐를 끼치고 사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가 [이방인]에 대한 해석을 심도있게 하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잡아주는 기준 자체가 틀리니 방향이 중구난방이 되고 맙니다.

이어서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있어요. 그리고 슬픈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슬퍼서 지중해의 찬란 한 햇살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아는 아니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햇살은 여전히 좋은 거죠.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 뫼르소는 패륜아겠지만 그는 햇살과 산책 같은 현재가 좋을 뿐입니다. 솔직한 사람이에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책은 도끼다, 박웅현

저자는 까뮈의 [이방인]을 서평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는 보통사람들의 관점에서 패륜아인 뫼르소를 좋게 미화시킵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는데 뫼르소처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정신상담을 받아봐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표출 못하는 솔직함을 당당히 내보이는 것.

그것이 엘리트주의를 첫 단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크리스챤 관점에서 이렇게 진단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 못하는 sociopath 혹은 psychopath. 이기적인 사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천재가 반사회적 기질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fit in 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피해를 주고 다니는 사람이 될테니까요.

그는 여러가지 책을 통해 솔직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극찬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니깐 말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통해서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통해서도, 레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책을 통해서도, 저자 박웅현은 이 솔직함이 덕목임을 찬양합니다.

실제로 그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방인], 뫼르소는 여러모로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인 것 같고, 사후가 있다는 것을 못 믿겠어요, 아니 안 믿겠어요. 뫼르소나 조르바는 죽으면 끝이다예요.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이 순간을 온전히 다 살아야겠어요. 때문에 더 가치로운 일을 위해 참아야 한다, 이런 것도 없어요.

-책은 도끼다, 박웅현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합리화의 극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현재를 온전히 다 살아야겠다. Carpe diem! 이 가치관은 크리스챤 가치관과 바로 반대되는 가치관입니다.

현재를 충실히 살려고 피나게 노력하기 위해서는,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믿겠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습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진 사람은 반사회적인 솔직함과 동시에 극단적인 자기합리화에 빠지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어 다음에서 자기합리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엘리트주의 현상 두 번째 자기합리화

인문학은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찾다보니 기준이 없으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엘리트주의에서 도드라지는 두 번째 현상은 자기합리화입니다.

박웅현의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어느 해 인도의 뭄바이에 갔을 때 가이드가 거지 아이들이 몰려들테니 절대 창문을 열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니다 다를까, 차가 신호대기로 정지하자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아리안 아이들의 아름다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저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잠시 후 차는 출발했죠.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쳐다보는데, 참 이상해요. 그 아이들에게 전혀 아쉬운 눈빛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측은하게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저게 뭘까, 저 아이들의 표정은 무얼 얘기하는 것일까? 돌아와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하니, 아이들은 저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어요. 다른 생에서 잘 살 수 있는 적선의 기회를 말이죠. 그런데 제가 그걸 안 받은 겁니다. 그러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가 불쌍한거죠. 이생은 아무것도 아닌데, 쯧쯧. 그들에게 인생은 한 번쯤 되돌릴 수 있고, 이생보다는 다음 생이 목표니까요.
-책은 도끼다, 박웅현

생각이 생각을 꼬리를 물다보면, 궤변이 생깁니다.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죠.

아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적선을 요구한 것이고, 저자는 철저히 본인의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포장했습니다. 아이들이 못된 어른들에 의해 무미건조하고 잘못된 삶을 사는 것을 이상하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책 한편에서는 이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Carpe Diem을 이야기 하면서도, 여기서는 이생보다는 다음 생이 목표인 불 교사상을 말합니다.

기준이 중구난방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읽어야 할까 참 고민이 많이 됩니다. 크리스챤 서적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해보아도, 악은 악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철저히 이기적인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고, 거기에 자기합리화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합리화가 심해지면 굉장히 이기적인 솔직함이 칭송을 받습니다.

이 두가지 현상이 모두 엘리트주의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가 심한가요?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준을 올바르게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