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성경 맨 처음에 나오는 책이라 수없이 접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선악과에 대한 설명을 명쾌하게 한 설교를 대학생 시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과정에 대한 설교는 들어봤어도, 왜 선악과를 아담이 먹은 것이 나쁜지에 대해 명확하게 풀이해준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묵상한 것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선악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었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던져보아야 할 질문은 선과 악을 알게하는 과실, 선악과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었나- 라는 질문입니다.

정답은 아니오- 입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몇 이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단들 중에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알게하는 엄청난 능력을 인간에게 허락해준 뱀을 찬양하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인류가 선악과 먹기 전에는 우매하다가, 뱀이 알려줘서 따먹음으로써 신과 같이 지혜로워졌다고 주장합니다. 비슷한 예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간에게 불을 몰래 전수해준 프로메테우스가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해주는 대신 자신의 신의 권위를 박탈 당하고 영원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단은 선악과 열매를 전수해준 뱀(사단)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전수해준 것 처럼 포장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 것은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악과 열매를 먹기 전에도 우리는 하나님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7-28

이미 인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혜는 이미 주어졌고, 그 지혜를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데 기쁘게 사용할 정도로 지혜로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악과 열매를 먹지 않아도, 즉 선과 악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으며, 그렇게 살기를 원했었습니다. 즉, 선악과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본래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선악과는 무엇일까요?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불행의 시작, 선과 악을 아는 것

선과 악을 아는데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준이 필요합니다. 기준에 따라서 어느 기준을 넘으면 선이고, 어느 기준을 넘으면 악이라는 규칙이 나옵니다.

사실 이 기준은 인간이 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 스스로가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올바른 기준이 아닐수도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선과 악을 정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면, 악한 행동을 했을 때 나오는 결과(consequence)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형벌(punishment)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주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율법이 세워질 수 있는 기반이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생겨나게 되었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행동일까요? 아니죠! 바보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악한 것을 알고 악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게 되는데, 그 벌은 곧 사망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근본적인 첫 두려움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인류는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은 것도 아담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인 첫 번째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9-10

그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실을 시사합니다. 만약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으면 성경에서 명확하게 밝혔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핑계를 댄 것이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적고 있지 않습니다. 아담은 벗은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아담은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하나님을 복종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런데 그는 불복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신이 벗은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봅니다.

  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불복종 한것이 아담이 벌거벗어서 느낀 수치심보다 덜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은 불복종이 더 중요한 사항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아담에게는 벌거벗은 그의 감정이 불복종보다 더 크게 와닿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2. 아담 스스로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인류로써 첫번째 내린 판단은 벌거벗은 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담은 벌거벗고 있는 것이 나쁘다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벌거벗은 것을 허락하셨는데도 본인 스스로가 나쁘다고 판단하고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었고, 그것은 인간을 옥죄이는 결과로 가져왔습니다.

 

첫째로는 그 판단이 항상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 대목에서 알수 있듯이 하나님을 불복종 한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정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을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로는 선과 악을 앎으로써, 두려움을 가져왔습니다. Fear.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매번 평가를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즉, 인류가 느낀 첫 번째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Fear of condemnation.

그리고 그 두려움은 사탄이 거짓말로 가장하여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악을 저질렀을 때 따르는 댓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구원자 – 예수

하나님께선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짓지도 못하는 분을 십자가에 희생하게 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삯을 치루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탄의 모든 책망(condemnation)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또한 모든 죄의 댓가를 예수님께서 치루셔서 우리는 자유케 되었습니다.

선악과로 인한 결과가 예수님 때문에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이제 사탄은 거짓말을 동원하여 우리를 속입니다. 마치 이 일이 해결이 아직 안된것 처럼 우리를 책망합니다.

“너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잖아. 이제 너는 그 댓가를 치뤄야 해.”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가 하신 일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8-19

첫 인류인 아담이 얻은 두려움 안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선악과 열매가 필요 없었던 존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