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가족의 두 얼굴> (최강현 지음)이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쓴 기독교인 심리상담자가 올린 글입니다:

특히 이민사회에서 생계유지에 몰두하느라 가족사이가 소원해지면서, 그리고 문화의 차이와 갈등으로 인해 더 벌어지는 세대차이의 간극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도움의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인 장 피아제(Jean William Fritz Piaget)는 아이들을 ‘인지적 이방인'(Cognitive Aliens)’ 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절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양극적이다.

아버지가 바빠서 관심을 쏟지 못한 것인데도 아이는 그것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아버지가 나를 버린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릴 것이라는 식이다.

아이의 성장발달 과정에서 필요한 의존욕구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아이는 어른이 된 후에도 상처 받은 내면 아이에게 영향을 받는다.

세상에 대한 소극적이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다.

부모에게 거부당하거나 자기 존재를 무시당한 많은 이들이 평생 불안해 하고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인생을 힘들게 살아간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일을 해도 잘 인정해 주지 않고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눈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애타는 조바심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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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특히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해소시키기 시작하는데, 그것 역시 건강한 방법은 아닙니다.

심리학자 요하임 마츠는 아웃사이더, 왕따, 울보, 언짢은 투덜이나 항상 화를 잘내고, 남의 욕을 얻어먹는 행동을 일삼아 미움을 사는 사람들의 근원에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부모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거절당한 자녀는 자신을 세상의 부담을 모두 짊어지고 몸을 구부린 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의 ‘아틀라스’로 여긴다.

​간혹 이런 사람들 가운데 환영 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 남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성공한 사람이 되어 부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무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밉살맞은 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이든 마음 깊은 곳의 피해의식으로 인해 오로지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든 모두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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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사회나 다른이를 위해 발산한 엄청난 에너지가 동기가 잘못되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영향을 사회적으로 끼치고 있다 할지라도, 인정을 갈구하는 심리에서 나온 영향력은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화목하지 않은 가족사 때문에 그릇된 동기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소망은 있을까요? 해법은 있을까요?

대답은 네, 있습니다. 아주 명확한 솔루션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자녀를 100% 인정하는 아버지

요한일서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자녀들을 위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한일서 2:23

위의 말씀은 문자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권세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예수님)을 부인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없고, 아들(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는 아버지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에게는 아버지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갖추어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로마서 8:15에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주어지지 않은 하나님을 호명하는 새로운 호칭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특징에 대해서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이었습니다.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여호와 이레 등등은 그런 하나님의 특성을 거론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바 아버지!”

그것은 직역하면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 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인 것입니다. (Abba가 아빠라고 직역이 되지 않는다는 신학적 주장도 있으나, 어쨌거나 abba라는 표현이 특별한 호칭으로 의존하거나 기댈 수 있는 친밀함을 가지는 관계의 호칭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추상적인 권위의 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바 아버지” 이름의 큰 비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계속 이에 대해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름으로 직접 부르시는 하나님.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부르심으로 친밀함을 표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창세기 22:11)

야곱아, 야곱아. (창세기 46:2)

모세야, 모세야. (출애굽기 3:4)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상 3:10)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사야 44:21)

마르다야, 마르다야. (누가복음 10:41)

시몬아, 시몬아. (누가복음 22:31)

사울아, 사울아. (사도행전 9:4)

 

기억하고 인지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녀라는 것을요. 예수님을 통해서 자녀가 되는 자격은 채워지고도 넘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순간, 잘못된 가족사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는지 대해서는 걱정하지 맙시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사에 관심이 많고, 해결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 자신이 새로운 지위와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그 과정은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