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놀랍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마침 퍼펙트한 예시가 보였다.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줄이야.

몇 시간 전에 올라온 김동호 목사님의 글을 살펴보면, “명성교회는 세습 때문에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교나 다름없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명성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명성교회가 속한 동남노회도 “더 이상 하나님의 성노회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링크: https://www.facebook.com/kimdonghopage/posts/1541169662640071)

오늘 쓸 글은, 어떻게 성도로서 교회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은 목회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성도를 위한 글이다.

토론토에도 교회가 참 많다. 캐나다에서 한인수가 가장 많은 영락교회부터 시작해, 가장 큰 한인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는 큰빛교회, 그리고 밀알교회, 서부장로교회, 본 한인장로교회 등등 큰 교회가 많다. 그리고 조그만 교회들도 참 많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교회들을 평가하며 비판을 거세게 했던 사람이었다. 이 태도는 분명 잘못된 점이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피해를 당한 부분이 있어서 비판한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나의 잘못된 태도는 “이상적인 교회”를 위해서 많은 교회를 판단했다는 점이다. 정말 이 부분을 크게 반성을 했다.

그렇다면 지역의 많은 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착한 병을 길러내는 현재교회

개인적으로 나는 “착한 병”을 싫어한다. 기독교인이면 무조건 착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인 중에 성격이 못된 사람이 정말 무더기로 많다. 착한 척 한다고 해서 복음이 흘러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보라. 얼마나 못됐는가? 그가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을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그가 쓴 신약성경을 읽으면 그의 못된 성격이 뚝뚝 묻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착한 병”은 성도를 길들이기 가장 쉬운 방법 중에 하나다. 목사나 사역자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오게끔 하고, 반항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 마치 대학에서 참교육에 관심없는 교수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전부 다 따라해야 높은 점수를 주는 그런 길들이기와 똑같다.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성도들은 무지한 양이 아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성도들이 사역자와 함께 동역자 레벨로 점점 들어서는 것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새신자 같이 양육을 받던 성도가 어느새 사역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돕는 동역자가 되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 목회자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은 성도들을 볼 수가 있다. 가령 방언기도만 하는 목사님의 교회에 있는 한 성도가, 예언의 은사와 통변의 은사를 받아 활동하며 인터넷과 책을 통해 관련 지식을 쌓아가며 영적인 깊이를 더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그 성도는 분명히 담임목사보다 해당 분야에 더 많은 깨달음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기독교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기독교인을 길러내야 한다. 언제까지고 순종적이고 목회자와 노회가 하는 바를 전부 수긍하는 사람만을 길러낼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개신교가 500년 전 가톨릭으로부터 나올 때 저항했던 정신이었는데, 현 개신교는 이런 부분에 있어 저항정신을 많이 잃었다. 그리고 착한 병을 양산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순종적인 사람만을 칭송한다.

착한 병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중에서 “착한 리더”가 양산이 되면 더욱 큰일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발 벗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인데, 착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리더가 교회 안에 많은 것이 우려스럽다.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

착한 병을 길러내는 것과 반대로, 율법적인 태도로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극과 극인 셈이다. 이들은 대체로 리더쉽이 타고 난 사람들이다. 리더가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성격은 못됐는데(?) 행정 일은 매우 잘한다. 총대를 메고 문제를 해결하며, 교회 안에서 비판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반드시 겪는 시험을 하나 거치게 되어있다. 그것은 자신이 심판자가 되는 유혹을 이기는 시험이다!

카리스마가 있고 방향 제시를 하나, “무엇이 올바른 교회인가” 혹은 “무엇이 이상적인 사역인가”에 사로잡혀 자신의 기준이 맞지 않는 사람을 비판을 거세게 한다. 사실 문제해결을 위해 비판을 하는 것은 좋은 거다. 그런데 대부분 비판을 하는 선을 넘어버린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저 교회는 □□하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야.”

아니, 그거 아니다. “효율을 따지는 것”은 복음의 정반대다. 복음은 세상이 말하는 효율을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상적인 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나? 이 시대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선지자가 절대로 아니다. 심지어 당신은 직접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고 말할 권리도 없다.

무엇이 구원인가? 자신에게 자격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포인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격이 없는 우리는 어느새 다른 이의 자격을 묻고 있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일이다. 성화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일이다. 교리에 갇혀서, 그리고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갇혀서, 특정 사람들이 성도가 아니라고 판단을 하거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을 하지 말자. (이 말을 하면 꼭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발을 뺀다. 난 교회가 아니라고 한 적 없고, 하나님의 교회 – 즉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것을 실제로 들었다. 이런 사람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비유와 강조를 위해 말한 것이니 걸러 들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이구.. 이거나 저거나 똑같은 판단이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에도 이상적인 교회운동을 들먹인다. 그리고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틀렸다. 정치는 개인의 이익과 직접 연결되는 분야다. 예수님은 정치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로부터 멀어지셨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로마제국을 와해시키고 정치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위해 오셨고,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며 “복음의 효율”을 버리셨다.

우리가 정치에 이상적인 교회관을 들먹이는 순간, 우리는 박근혜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 혹은 많은 사람을 죽인 전두환이나, 독재정권을 거친 박정희 등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 (오해하지 말자, 박근혜, 전두환, 박정희가 잘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은 존재하게 마련이고, 성도 중에서도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인이 편을 갈라 파편이 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정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는 지역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전혀 없다. 그런 면에서는 김동호 목사님은 정말 잘못하고 있는 셈이다. 형제자매를 부인하면 안 된다. 형제자매의 기준도 그런 식으로 정하면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진짜 사탄교에 맞서 같이 싸워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명성교회가 잘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잘 한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성교회가 교회가 아니라고 말은 할 수 없다. 몇 년전에 크게 논란이 있었던 사랑의 교회도 마찬가지며, 또 목회자의 자질에 논란이 크게 있었던 삼일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전체를 다 묶어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비두고 벌 받을 부분도 하나님께 그냥 맡기면 된다. 우리가 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선한 성도가 될까?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착한 병”에 걸린 성도도 아니고, 남을 판단하는 성도도 성경적이지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한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문제가 생겨서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비판을 하되, 어떻게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자격 없음”을 되새기는 데 있다. 어차피 구원은 나에게 자격이 없는 데서 출발을 하였다. 이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하는 성찬식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상기시키는 데 있다. 성찬식은 우리에게 구원의 자격이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자격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그런 거룩한 기념식이다.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실용적으로 한번 예를 들어보자. 자신이 섬기던 교회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사역 방향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방향이다. 대다수 사람은 일단 몇 년은 같이 섬기고 싸움을 일으키고 교회를 옮긴다. (이거 내가 많이 했던거다. 반성한다) 또한 대부분 담임 목회자가 바뀌어서 몇 수십년동안 교회가 지향하던 방향이 바뀔 때 이것을 경험한다.

실용적인 조언을 주자면 이것이다. 교회의 리더는 어차피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교회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선교단체)의 사역 방향이 바뀌었을 때, 교회 리더들에게 자신의 피드백을 최대한 주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런데도 방향이 바뀌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 교회의 방향전환을 인정해주자.

마음속 깊이 인정을 해주고, 자신이 그 사역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 조용히 떠나자. 그리고 응원을 해주자. 그들은 세상인이 아닌 우리의 형제자매다.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 날 것 없다. 씁쓸하지만 떠나자.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피해를 본 성도들이 참 많다. 위에 언급한 토론토의 대형교회도 전부 큰 문제가 하나씩은 꼭 있다. 실제로 개인적으로 금전적 피해를 보았거나, 성숙하지 않은 리더들 때문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럴 때는 당연히 위로해주고 같이 편을 들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노방전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기겁한다. 저렇게 무식하게 전도하면서 주변 기독교인을 피해 입힌다고 비판을 한다. 하지만 혹시 이것을 아는가? 그들도 우리의 소중한 형제자매다. 피보다 더 진한 물로 맺어진 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같이 짊어져야 할 형제자매인 셈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정해줘야 할 형제자매죠.”

복음에 있어 비효율적인 부분은 어차피 우리가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격이 없음을 다시 새기자

정치와 이상적인 사역 때문에 편을 갈라서지 말자. 그냥 사역을 같이 안 하면 될 일이다. 형제자매로 인정은 해주되, 같이 일하지만 않으면 된다. 어차피 내가 믿는 방향은 그쪽 방향이 아니니까. 여기에 교회가 화합하는 비밀이 있다. 우리는 본래 한 교회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한 몸이다.

나는 지금은 토론토에 있는 한인교회들을 많이 사랑한다. 물론 나와 방향이 맞지 않는 교회도 있다. 그리고 잘못하고 있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잘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은 것은 아니다. 그저 복음에 비효율적으로 나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특정 단체 때문에 피해를 본 성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응원을 꼭 해준다.

토론토는 크고 작은 교회가 예수님이라는 목적을 향해 같이 달려간다. 너무나도 건강한 교회가 많다. 이런 도시에 살고 있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는 복음에 효율을 따지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