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에 정의(justice)를 가져오려고 노력을 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의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다.

사회적인 부조리는 예수님에게 집중한 다음으로 해결이 되는 부산물 개념으로 가야한다. 환경적인 부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에게 집중하면 전부 다 따라오게 되어있다.

우리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한계적인 존재다. 예수님을 중심 삼든지 아니면 다른 개념을 중심 삼든지 둘 중 하나인 생활을 하루하루 보내게 된다. 구약의 만나와 메추라기도 하루치 분량으로 주어졌다. 예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한 번에 한 개념만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무조건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안식, 지혜의 첫 출발

기독교인이 세상보다 앞질러 가는 방법에는 안식이 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We fight the good fight of the faith! (1 Timothy 6:12) 다른 싸움이 아닌 믿음의 싸움을 우리는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싸움은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 거하는 믿음을 가지려고 의식적으로 새기는 믿음의 싸움이다. 당신은 오늘도 예수님을 떠올렸는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상인이 보지 못하는 시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안식에 들어가면 머리로 쓰는 솔로몬의 지혜보다 훨씬 큰 예수님의 지혜가 임한다. 예수님의 지혜는 얼마나 대단할까? 이를 이해하려면 솔로몬의 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 먼저 가늠해보면 된다. 당시 솔로몬의 지혜는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나 이집트 지혜보다 훨씬 대단했는데(열왕기상 4:30),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랍이나 중국이나 한국의 지혜보다 훨씬 컸음을 말한다.

실제로 솔로몬의 시대부터 아프리카와 중국의 첫 교류가 이루어졌고, 유대인도 중국과 교류를 이때부터 시작했었다. 심지어 솔로몬의 시대에 그리스에서는 여성도 선거권을 가졌을 정도로 여성권리가 많이 허용되어 있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이보다 더 뛰어났다.

또한 고고학자들이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 페니키아 문자도 솔로몬의 시대에 활용이 되었었는데, 페니키아 문자는 고대 히브리어, 아랍 문자, 그리스 문자, 로마자, 그리고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의 조상격인 문자다. 솔로몬의 지혜는 이보다 더 뛰어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혜 그 자체셨다! (요한복음 1:17)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의 지혜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그 자체셨다. 솔로몬은 죽어서 그의 지혜는 일시적이었지만,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예수님의 지혜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지혜라는 것을 은밀히 표현하시기도 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4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마태복음 23:34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지혜가 일러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선지자와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신다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이 지혜라는 말씀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지혜가 보내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보내신다. 예수님이 곧 지혜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인이 치열하게 얻으려고 노력하는 솔로몬의 지혜를 부러워하지 말자. 이성과 논리,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훨씬 미련하다. (고린도전서 1:25)

안식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피난처를 찾는 것과 같다. 의식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세상이 창조하지 못하는 창조의 능력과 세상이 얻지도 못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그 격 자체가 틀리다! (야고보서 3:17)

나의 머리와 힘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머리와 힘이 작동되기 시작한다.

 

세상이 외치는 지혜와 정의

사실 우리 기독교인은 그동안 세상이 떠들썩하게 화제를 몰아왔던 것에 너무 휩쓸려왔다. 새로운 화제가 터질 때마다 같이 떠들썩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주도권을 세상에게 뺏기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화제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존재다. 그리고 거룩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 때문에 우린 거룩해졌다. (히브리서 10:10)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이 외치는 화제와 정의(justice)에 우리는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을까? 해답은 이 글의 처음에 썼던 대로,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 안에만 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세상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다양한 화제를 살펴보자.

캐나다는 내년이면 오락용 마리화나가 합법화 된다. 그 말은 대마초가 이제 담배처럼 기호제품이 된다는 말이다. 내년이 되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길거리에 모여 대마초를 피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그리고 이미 캐나다의 한 대학은 마리화나 재배에 관련한 수료증 코스를 설립했다. 마리화나 재배(cannabis)는 앞으로 돈이 되는 신성장 사업이다.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북미가 이런 트렌드를 만들어내면 전세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근미래에 이 이슈는 한국사회에도 들이닥칠 문제다.

동성애자의 피나는 노력은 전세계적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호주는 이번 달에 동성애 결혼을 합법적으로 허용했다. 사실 동성애 결혼에 찬성한 호주인은 그동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주 정치인들이 그동안 막아왔다. 우리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결국 호주도 대세를 거스릴 수 없었다. 동성애는 더 이상 소수(minority)가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세력이 되었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세상은 정의를 외친 결과로 소수였던 동성애자를 품어주었지만, 동성애자들에게 점점 실망을 하고 있는 추세다.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죄를 짓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한 예로, 온타리오 주총리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캐나다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토론토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가 전부 온타리오주에 있으며, 캐나다의 기술과 스타트업, 금융가도 온타리오주에 많이 몰려있다.

온타리오 주총리는 Kathleen Wynne이라고 불리우는 여성 총리로, 이 사람은 동성애자다. 그런데 2013년에 처음 온타리오 주총리로 임명이 되었을 때 인기가 많았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다. 특히 전력공급과 관련해서 그녀의 정책이 실패로 온타리오주의 전기세가 폭등할 위기에 처해지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Wynne 총리는 동성애 관련 일과 법안만큼은 열심히 챙긴다는 후문이다. 그녀의 이기적인 행보에 당연히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요즘 온타리오 주민들은 기껏 첫 여성 주총리이자 동성애자 총리로 뽑았더니,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득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라고 비아냥 거린다. 역시 정치인은 어쩔 수 없다라며 실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럴 때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세상은 점점 낙태에 관대해지고, 안락사에도 점점 관대해지는 추세다. 특히 캐나다는 이제 낙태약인 Mifegymiso을 임신한지 9주 내에 처방을 쉽게 받아 복용하도록 최근에 법적으로 허용을 했다. 임신한지 9주면 사실 생명이 태어난 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에 대해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올바른 성도의 자세

세상의 화제는 추(pendulum)와도 같아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반복한다. 따라서 이 토픽, 저 토픽을 따라가다보면 줏대가 없이 흔들리기 딱 좋다.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우리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었을 때 세상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해결책 보다도 훨씬 크신 예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고나면 해법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그것도 최상의 솔루션으로 말이다!

예수님만이 시간을 통제하신다. 따라서 타이밍도 예수님께 달려있다. 일의 해결에는 타이밍이 제일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솔루션이 전개가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계시다는 정답이다!

구원을 우리의 자격이 아닌 예수님의 자격으로만 받았다면, 그리고 그 전에는 우리의 자격만 따지는 교만을 회심했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자격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파격적인 은혜의 메시지를 세상에 외치자.

술 중독에 담배 중독이라구요? 마리화나도 핀다구요? 성경에서는 몸을 거룩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술, 담배, 마리화나 중독이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시고 관계를 가지기 원하세요!

동성애자라구요? 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죄도 예수님께서 다 다루세요! 예수님이 동성애자이신 당신을 너무 사랑하세요. 제가 알고 있는 소중한 예수님을 당신도 알기를 원해요!

낙태와 안락사를 생각하신다구요?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말을 들으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것 아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아픔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을 치유할 능력도 있으세요! 제가 아는 안식의 예수님을 당신도 알기를 원합니다. 당신도 참된 안식을 경험했으면 합니다. 우리 한번 이야기 해볼까요?

어떤가? 대화가 저절로 복음으로 흘러가지 않는가? 상대방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는 예수님께서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죄를 내가 판단하고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 항상 문제가 생긴다. 세상인에게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성경에서는 어떻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지 소개하는 동시에, 반드시 이야기가 예수님으로 귀결이 나야 한다. 예수님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은 대화에 매우 효율적이다. 바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안타깝게도 율법만을 외친다. “담배와 술은 죄요! 마리화나 피는 것도 죄요! 동성애가 죄요! 낙태와 안락사가 죄요!”

대신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외쳐야 한다. “예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세요!”

그랬을 때, 우리는 놀라운 예수님의 지혜가 가장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 더 이상 세상의 화제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잠언 9:10은 말한다. 하지만, 그 경외함은 내 머릿속으로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말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격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만이 여호와를 완벽하게 경외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거기에 지혜의 근본이 있다! 할렐루야!